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지애나 구입 (문단 편집) == 후일담 == * 루이지애나 구입 이후 제퍼슨 대통령은 [[미합중국 육군]] [[장교]]인 메리웨더 루이스 [[대위]]와 [[윌리엄 클라크(탐험가)]] [[소위]]가 지휘하는 탐험대를 보내 루이지애나 지역을 탐사했다.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루이스 클라크 탐험|#]] 여기서 [[사카자위아]]가 활약한다. * 오늘날의 루이지애나주, 즉 뉴올리언스 지역은 1804년 10월 "루이지애나 준주(territory)"에서 분리되어 한동안 올리언스(오를레앙) 구역으로 불리다가, 1812년 4월 정식 주인 루이지애나로 가입했다. 두 달간 "루이지애나주"와 "루이지애나 준주"라는 이름이 공존하다가 6월 이름이 미주리 준주로 변경되었다. * 제퍼슨의 후임 대통령인 [[제임스 매디슨]] 때의 [[미영전쟁]]에서 가장 큰 전투인 [[뉴올리언스 전투]]가 벌어지면서 대 전장이 되었다. [[1815년]] [[1월 6일]]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미국은 크게 승리하면서 평화 협상 중이던 미영간의 전쟁 승패에 쐐기를 박았고[* 조약에 변경은 없었다.] [[앤드루 잭슨]] 장군은 전쟁 영웅이 되어 9년 뒤 대통령에 당선되어 재선했다. [[1818년]] 10월, 영국과 미국은 북위 49선을 기점으로 국경을 정하기로 하면서 루이지애나는 영국령 "루퍼트 랜드"의 일부를 편입하고 대신 북위 49도선 이북 지역을 넘겨줬다. [[http://commons.wikimedia.org/wiki/File:United_States_1818-10-1818-12.png|#]] 또 1819년 미주리 준주의 북위 36도 30분 이남이 "아칸소 준주"로 독립했다. * [[1819년]]에 맺어져 [[1821년]] 3월 적용된 애덤스 오니스 조약 역시 일시적으로나마 중요한 조약이다. 애매했던 루이지애나의 서쪽 경계(즉, 미국의 서쪽 끝이자 스페인과 만나는 국경)를 둔 문제였다. 미국은 서부 경계를 [[로키산맥]] [[정상]]이라고 생각했는데 스페인은 미시시피강이 닿는 곳이 다라고 보았으며 스페인이 [[오레건]] 지방으로 북상하는 것도 미국 입장에선 좀 불편했다. 반면 스페인은 독립 전쟁이 빗발치고 영국의 견제가 심하자 더 이상 북미 식민지를 제대로 관리하기가 어려웠는데, 플로리다도 반쯤 [[미국인]]들이 늘어나던 상황이었다. 결국 협상을 하려던 점에서 양국의 의견이 일치했다. 이번에도 어떻게든 영토를 늘리려는 미국이 스페인의 요구를 들어 많이 양보했다. 새바인강(Sabine river), 경도 서위 100도, 미시시피강의 상류 지류인 [[아칸소 강]] 등을 미국의 루이지애나와 스페인의 식민지 "[[누에바에스파냐]](뉴 스페인)"의 경계로 하는 대신 스페인의 북상을 위도 42도선으로 제한한 것. 결과적으로 루이지애나 영토는 일부 스페인에 양도되고 대신 미국이 거진 반 영토가 된 [[플로리다]](1845년)를 사들이기로 했다. [[http://commons.wikimedia.org/wiki/File:United_States_1821-07-1821-08.png|결과]] 그런데 직후인 1821년 9월 [[멕시코]]가 독립하면서 스페인으로서는 별로 이득 본 게 없게 되었다. * 루이지애나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주로 승격된 주는 1821년의 '''[[미주리]]'''. 노예주였는데 이를 문제로 위도 북위 36도 30분(미주리의 남부 주계)을 기준으로 남부는 노예주, 북부는 자유주로 하는 미주리 협정이 그 전 해인 1820년 맺어졌다. 이로서 루이지애나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"미주리 준주"로 불렸던 이 지역은 이름이 없어졌다. 북서부 일부가 1834년 미시간 준주의 일부가 되었다가 미시간이 1837년 승격되고 그해 3월 [[위스콘신]]을 거쳐 다시 아이오와 준주가 되었다. '''[[아칸소]]''' 역시 노예주로 1836년 승격하면서 아칸소 준주도 폐지되었다. * 한편 루이지애나 이서에 [[텍사스]]가 자립을 시도했으나 멕시코에게 재정복당하면서 루이지애나 지역과 그 이서 지역은 이 정치적 변동을 [[매의 눈]]으로 지켜보고 있던 미국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. 멕시코는 스페인과 달리 국경을 열었고(...) 결국 텍사스에 미국 출신 이주자가 넘쳐나면서 [[1835년]] 봉기로 루이지애나 이서에 바로 [[텍사스 공화국]]이 들어섰다. 텍사스 공화국은 서부 국경을 [[리오그란데 강]]이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[[미국-멕시코 전쟁]](1844~1846)이 벌어지고 말았고 결과는 당연히 미국의 대승. 스페인이 따내서 멕시코에 넘겨준 루이지애나의 일부는 다시 고스란히 거대한 텍사스주의 영토로 들어가 버렸다. 1850년 텍사스주의 다시 대폭 재조정되어서 지금 크기의 텍사스가 되는데 이 영역은 후에 콜로라도와 [[뉴멕시코]]가 된다. * [[아메리카 원주민]]들을 [[미시시피강]] 서부로 유배보낸 눈물의 길도 루이지애나 구입의 산물이다. 그러면서 [[1824년]]부터 "인디언 준주(인디언 구역, Indian territory)"가 설정되었다. [[1854년]] 약간의 구역 변경(축소)은 있었지만 이곳이 오늘날의 [[오클라호마]]다.[* 오클라호마는 이 자치주 문제로 가장 늦게 가입한 주 가운데 하나다.] 그 이북에 [[캔자스]] 준주와 [[네브래스카]] 준주가 생성된 것도 같은 해인 [[1854년]]인데 결국 이들이 주로 가입하면서 [[남북전쟁]]의 큰 떡밥이 되고 말았다. [[제임스 뷰캐넌]] 참조.[* 남북전쟁 기간에는 네브래스카의 가입이 보류되면서 준주 지역이 네브래스카, [[콜로라도주]], 다코타(1861.3), 몬태나(1864.8) 등으로 구분되면서 사실상 주가 들어설 텃밭이 닦였다.] 그렇게 미주리, 아칸소, 텍사스 이래 [[아이오와]](1846년), [[미네소타]](이전에 준주, 1858년), 캔자스(1861년), 네브래스카(1867), 콜로라도(1876), [[노스다코타]], [[사우스다코타]], [[몬태나주]](1889)가 주로 편입되면서 흡수 86년만에 사실상 구 루이지애나의 모든 지역이 미국의 주가 되었으며 [[1907년]] 대망의 오클라호마주가 가입했다. * [[2003년]]은 루이지애나 구입 200주년이었지만 하필이면 대통령이 [[조지 W. 부시]]. [[이라크 전쟁]] 반대로 [[자크 시라크]] 대통령은 방미하지 않았으며 2년 뒤인 [[2005년]] 최악의 [[허리케인 카트리나]]가 뉴올리언스에 몰아닥쳤다. * 이때 프랑스에게 넘긴 채권은 미국 정부가 국제시장에서 발행한 최초의 채권이었다. 이 채권의 이자는 6%고 15~20년 안에 상환하는 조건이었는데 이 이자가 계약대로 정상적으로 지급되면서 미국 정부의 신용은 미국 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크게 올랐다. 이로 인한 미국 국채의 신뢰 획득에 관해서는 해당 기사를 참조할 것. [[https://www.asiae.co.kr/article/2022082409101814728|[백영란의 역사책방] 루이지애나 매입과 하이파이낸스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